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칠천량 해전 (문단 편집) === 조선 수군의 약화 === 갑오년(1594)에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돌아 수군 역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로 인해 임란 개전 후 최대 2만 명 이상이던 병력이 을미년(1595) 봄에는 4천1백여 명으로까지 줄어들었다. 특히 이때 사망자의 대부분은 임진왜란 첫해 해전에서 승리를 경험했던 전투력이 높은 병력들이었다.[* 『이순신 평전』, 책문, 2012, pp. 214-237] * 수군은 태반이 역질에 죽어 선사(船師)가 외롭고 허약하니 적을 소탕하는 것은 고사하고 전선도 운용하기 어렵다.[* 『선조실록』 권52, 27년 6월 28일(을해)] * 노직(盧稷)이 아뢰기를, “연해에 전선(戰船)이 비록 많으나 만약 배를 부릴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운행하여 수전(水戰)을 독책(督責)할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수군(水軍)의 번가포(番價布)를 경강(京江)에 사는 노젓기에 능숙한 사람에게 주어 격군(格軍)을 삼아야 합니다.”[* 『선조실록』 권72, 29년 2월 2일(기해)] 당시에는 협상 시기라 큰 교전이 없어서 눈에 띄는 변화를 감지하기 힘들었으나 이 영향은 [[장문포 해전]] 때부터 서서히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이와는 반대로 일본군은 전술 교리가 향상되고 요충지를 점령하여 곳곳에 요새를 만들고 대포를 설치하는 방식으로 수군의 움직임을 견제하였기 때문에 조선 수군은 임진년 때처럼 적극적인 공세를 함부로 펼치기 힘든 상황이었다. 한편, 수군의 병력 부족 문제는 정유년(1597) 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해 병력을 충원하는 과정에서 동년의 3월 기록에 따르면 호남 지방이 수군을 징발하는 문제로 잡상인의 통행마저 없어져 기존 도로망이 사라질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칠천량 해전 한달 전인 6월 중순에 와서야 인력 충원을 어느 정도 완료하였으나 이들은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한 인원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초기의 수군이 보여준 승전에 고무된 나머지 강화 교섭기 동안 위기를 맞은 조선 수군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고 이는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부산 앞바다 출전의 무리한 강요로 이어졌으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요인들이 조선 수군의 몰락을 초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